관악산의 봄 0
 작성자: 최고관리자  2011-03-24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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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높은 산의 수려한 계곡이나 매우 뛰어난 경치를 동천이라 한다. 신선이 산다는 도교의 이상향 별유동천(別有洞天)에서 나온 말이다. 별유동천, 다른 말로 별유천지(別有天地)라고도 한다. 좁은 땅을 가진 나라지만 경승지지가 많아서 우리나라에도 동천(洞天)이란 이름을 얻은 데가 꽤 여러 곳이다. 금강산 만폭동의 봉래풍악원화동천, 지리산 하동의 화개동천, 악양동천, 동해 무릉계곡의 두타동천, 강화 마니산의 함허동천......

   
자하동천의 마애명문(磨崖銘文)

관악산엔 자하동천이 있다. 그것도 한 곳이 아니고 둘이다. 산마루를 사이에 두고 동쪽 과천향교에서 연주암으로 이어진 계곡이 그 하나이고, 북쪽 신림동 서울대학교 쪽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계곡이 다른 하나다.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 새겨진 바위가 두 계곡 입구에 있었는데, 동쪽 계곡의 것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북쪽의 것은 1970년대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가 생기면서 매몰되었다. 그래서인지 현재 자하동천이라고 하면 과천향교에서 연주암까지 이어진 계곡을 가리킨다.

‘백운산인(白雲山人)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 새겨진 암벽은 자하동천 들머리 KBS삭도장 건물 건너편에 있다. 근처에 ‘단하시경(丹霞詩境)’, ‘자하동문(紫霞洞門)’ 이란 글씨와 송시열의 시문이 더 있다고 하는데, ‘단하시경’은 찾았어도 '자하동문’과 송시열의 문장은 찾지 못했다. ‘백운산인 자하동천’은 자하 신위 선생의 글씨이고, 서체의 맛이 전혀 다른 '단하시경'은 추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관악산은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지며 한강 남쪽에 이르러 불꽃처럼 솟아오른 산이다. 한양을 동서남북의 방위신 개념 안에 두었을 때 좌청룡에 낙산, 우백호에 인왕산, 북현무에 북악, 그리고 남주작으로 남산이 거론된다. 남산이 안산(案山)이라면 같은 방위에 있는 관악산을 조산(祖山)으로 본다. 서울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서울로는 조산이지만, 과천 쪽에서 본다면 관악산은 과천의 진산이다.

관악산 연주암으로 가는 길, 연주암은 관악산의 남동사면에 과천 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으므로 관악산의 수사찰(首寺刹)인 연주암을 참배하고자 한다면 과천 길로 가야 제격이라는 조언을 생각하고 과천향교 앞에서 출발하여 자하동천을 따라 산길을 오른다.

   
자하동천 들머리 계곡

과천향교 앞에서 KBS삭도장 건물에 이르는 계곡은 그야말로 생태복원이 필요한 곳이다. 골짜기 가장자리를 따라 화강암 축대를 쌓고 동네 쌈지공원 가꾸듯이 해 놓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돌탑을 쌓는다고 개울 바닥의 자갈을 긁어내다시피 걷어 낸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자갈과 모래가 개울 바닥에 충분히 있어야 물속 생물들이 목숨 붙어 살아간다.

   
자하동천의 산개구리 알. 모든 생명은 구(球)에서 시작된다.

자갈과 모래가 수질 정화에 기여하는 측면도 무시하지 못하지만, 거기에 깃들어 살아가던 수서곤충이 사라지면 개울로 떨어지는 낙엽이나 기타 유기물들이 오랫동안 분해되지 않은 채로 쌓여있게 되어 미관상으로도 보기 좋지 않을뿐 아니라 산소 용존율이 떨어지고 부영양화가 일어나며 모기가 발생하는 등 여러 가지 환경 문제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하늘 푸르고 햇살 따스하니 산길을 걷는 기분은 그만이지만, 날이 좀 심하게 건조하다 싶다. 계곡의 건천화가 걱정스럽다. 간간이 가는 물줄기와 웅덩이 같은 소(沼)가 보일 뿐, 어디에도 신선들이 노님직한 장소는 보이지 않는다. 머리 위로 삭도가 지나가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계곡을 오르내린다. 단하시경이니, 자하동천이니 다 옛말이 되어버렸다.

   
생강나무 꽃(2006년 3월 17일 촬영)

생강나무 겨울눈이 몰록 비늘껍질을 틔우고 있다. 한 보름쯤 지나면 노오란 꽃이 피겠지. 잎사귀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친구다. 산수유 꽃과 흡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산수유나무는 야생으로 자라지 않는다. 깊은 산에서 야생으로 핀 노란 꽃을 본다면 일단 생강나무로 여기시라. 꽃이 무리지어 피어나면 감미로운 향기에 발목이 잡혀 쉽게 돌아서지 못한다.

   
관악산 회양목의 열매껍질 쭉정이. 영락없이 부엉이 얼굴을 닮았다.

이곳의 특이한 식생은 단연 회양목이다. 늘 주변에서 전정이 잘 된 화단 울타리용 회양목만 보다가 골짜기에서 멋대로 자라는 나무들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절로 든다. 회양목은 워낙 성장속도가 늦고 크게 자라지 않는 나무라서 수 백 년을 살아도 키는 수 미터를 넘지 않고 굵기도 어른 팔뚝 두께를 넘지 않는다. 화성 용주사에 가면 대웅보전 앞에 오래 전에 고사해 버려 잿빛이 된 수령 200여년의 회양목을 볼 수 있다.

   
회양목 꽃(2008년 3월 하순 촬영)

내게 회양목은 석회질 토양에서 잘 자란다는 서식 특징이나 단단한 목재의 용도보다는 꽃향기로 먼저 기억되는 나무다. 말 그대로 기가 막힌다. 어느 봄날엔가, 나도 모르게 “사람의 영혼을 훔치는 향기구나!” 탄식했던 적이 있다. 황록색 꽃은 녹색의 잎 사이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데, 그처럼 생김새가 수수한 꽃들은 매개 곤충들을 유혹하기 위해 후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유달리 더 향기롭거나, 아니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오른다. 리기다소나무와 굴참, 졸참, 신갈, 노린재나무가 섞여 자라고, 계곡 가까이로는 물오리, 쪽동백, 팥배나무, 개암나무가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관악산의 노간주나무 열매
비탈면에 흘러내리는 토양은 자갈과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 토양이다. 메마르고 척박하다. 깔딱고개를 넘어서 가자니 산길 언저리에 노간주나무가 회청색 열매를 달고 있다. 노간주나무는 메마른 바위산에서 척박한 환경에 잘 적응해 살아가는 나무다. 산등성을 오르다 보면 쉽게 볼 수 있다. 회청색 열매는 흑갈색으로 익어 가는데, 열매로 짠 기름을 두송유(杜松油)라 하여 통풍이나 관절염, 신경통에 약으로 사용했다. 정작 서양에서는 양주 진(Jin)을 만드는 재료로 더 유명하다. 나무의 학명을 따라 '주니퍼 진'이라 불리는 술이다.

   
연주암 가는 길

약수 두 곳엔 음용부적합 판정이 났는지 ‘사용중지’ 팻말이 붙어있다. 오르막길에 내걸린 연등이 반갑다. 평소엔 그리 보기 싫어하던 플라스틱 연등이건만 쉬엄쉬엄 걸었어도 힘에 부치다 보니 절이 가깝다고, 조금만 더 기운을 내라고 격려의 인사를 보내는 것 같아 고마운 생각마저 든다.

등산로 삼거리를 그냥 지나쳐 간다. ‘연주암 550m'란 이정표가 마음을 바쁘게 만든 탓도 있지만, 쉼터가 사람들로 들어차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마땅치 않다.

절에 가까이 이르러서야 숲이 뚫리기 시작한다. 이즈음부터는 제법 덩치 있는 나무들을 볼 수 있다. 그럭저럭 튼실하게 자란 귀룽나무, 물푸레나무가 자라는 협곡이다. 협곡 그늘진 곳엔 눈얼음이 얼어 반들반들 윤이 난다. 드디어 연주암이다.

   
연주암 천수관음전
   
▲ 요사채 석축

연주암은 성채를 연상시킨다. 산정을 온통 다 차지하고 있는 유럽의 요새형 성채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근래 수 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의 위용이 ‘영험한’ 기도도량의 살림규모를 짐작케 한다.

석축 윗부분에 버려진 듯 잘려져 뒹구는 거무스레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옛 연주암 답사기에 요사채 석축에 고사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더니 그 나무가 아닌가 한다. 그대로 두면 위험하다 싶어 스스로 넘어가기 전에 미리 손을 본 것일 게다.

   
천수관음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마당의 느티나무
전국 어느 사찰엘 가던지 오래된 느티나무 몇 그루 없는 곳이 없다. 본전 마당에, 뒤편 후원에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느티나무가 꼭 몇 그루씩은 있다. 험한 산길을 오르다가도 길가에서 제법 한 덩치 하는 느티나무를 만나게 되면 절이 가깝구나 여길 정도다. 마을의 정자목으로서 만이 아니라 사찰의 산문으로서도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나무다.

나무의 황제라고 했던가, 느티나무는 목재의 결이 곱고 무늬가 아름다우며 말려도 갈라지거나 잘 비틀리지 않는다. 잘 썩거나 벌레도 쉽게 슬지 않고, 단단해서 마찰이나 충격에도 강하여 나무가 가진 모든 장점을 다 갖추었다고 하는 나무가 느티나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 모두 느티나무라는 사실은 우리 숲의 역사와 문화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건축적 코드로 읽혀지기도 한다.

해 잘 드는 요사채 마루는 품이 넉넉하다. 햇살이 구석구석 온 절집에 가득하다.

불교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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