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대 비둘기 0
 작성자: 최고관리자  2011-03-24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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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암은 본래 관악사라는 옛절이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에 의해 관악사(冠岳寺)라는 이름으로 초창되었으나, 고려 말까지 폐사되다시피 하다가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관악사 옛절을 현재의 연주암 위치로 옮겨 새로 일으켜 세우면서 연주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관악사지는 현재 연주대 아래 서울방향을 바라본 위치에 있다.

   
점심공양을 위해 천수관음전 반 바퀴를 빙 둘러 줄을 선 사람들. 

연주암에서 등산객들에게 무료 점심공양을 한단다. 사람들이 천수관음전 반 바퀴를 빙 둘러 줄을 서 있다. 연주암에 도착한 시간이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점심공양을 받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은 1시간이 넘도록 좀체 줄어들 줄 몰랐다. 공양간은 공양간대로 만원이었다. 자리가 마땅치 않자 그릇을 들고 선 채로 먹는 사람도 꽤 많았다. 휴일 한낮, 도대체 몇 사람이나 연주암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일까.

마실 물과 함께 한 끼니 정도의 음식은 배낭에 충분히 가지고 다닐 수 있다. 살펴보건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점심을 절에서 해결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방금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가서 빵이나 과일, 과자 따위를 따로 먹기도 한다. 후식을 먹는 셈이다.

어지간하지 않고선 절집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환경부담도 최소화 하는 것이 산행의 원칙인지라 우리 각자의 배낭 속에 허기를 면할 정도의 점심거리는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배낭 속의 음식을 꺼내 먹지 않았다. 대신 전망이 좋은 천수관음전 앞을 돌아 행렬의 맨 끝에 가서 섰다. 사람들 속에 섞여 한 번 먹어볼 요량이었다. 궁금했던 것이다.

한참을 줄을 서서 비빔밥과 된장국을 받아 가지고 식탁에 앉는데,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미역, 김치, 고추장이 담긴 그릇을 앞에 놓고 이리저리 불안하게 눈치를 보고 계신다. 밥과 국은 이미 말끔히 비운 상태.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 드셔야 해요! 이 산꼭대기에서 남은 음식 처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텐데... 남은 음식을 받기나 할런지 모르겠어요.”

아주머닌 결국 그대로 일어서셨다.

“고추장이 짜서 못 먹겠어. 그리고 난 이런 미역나물 안 좋아해!”

남은 음식을 다른 데 가서 마저 드신 것인지, 아니면 설거지통에 그릇과 함께 넣어 버린 것인지, 그도 아니면 다른 조치를 취하신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을 감당하자니 물도 충분치 않고 설거지도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북새통이 따로 없다. 그릇과 수저를 씻고, 끝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과 설거지통에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뒤로 하고 공양간을 나온다. 이 산정에서 저 많은 등산객들을 위한 식사 제공이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래야 하는 이유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정을 넘어서는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연주암 오수처리시설

연주암은 몇 해 전에 쓰레기 불법 매립과 오수처리 불량, 또 그로 인한 악취 문제로 환경단체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연주암에서 예전의 그런 문제들은 쉽게 연상이 되지 않는다. 휴일 절집 마당을 가득 채운 인파에 비해 도량이 대체로 깨끗하다는 인상을 준다. 쓰레기통 하나 없다. 각자가 만들어 내는 쓰레기는 각자가 되가져 가야 한다. 도량 안팎에서 발견된 술병이며 캔, 플라스틱 같은 재활용품들을 따로 모아 지게에 지고 내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오수처리시설도 제법 잘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절 입구의 등산객들을 위한 공용화장실도 웬만한 편이다.

다만, 화장실이 수세식이어서 물 부족 문제와 수질문제가 걸린다. 아니나 다를까, 일을 보고 난 사람들이 물이 잘 안 나온다며 난감해 하는 소리가 화장실 여기저기서 들린다. 수세식 화장실은 많은 물을 필요로 한다. 높은 산에서 그것은 그대로 계곡의 건천화로 이어지고 수질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대체로 깨끗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저녁나절 무렵이면 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 물 안 나오는 화장실의 모습이 어떨는지 대략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본 화장실은 처리수를 세척수로 재활용 하는 중수도시설로써 물이 부족 하오니 아껴 써 주시기 바랍니다.’과천시청에서 화장실 내부 벽에 붙여 놓은 문구다. 산을 찾는 사람들은 앞으로 더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설혹 줄어든다 해도 거기서 거기이기가 쉽다. 산정의 수세식 화장실은 반환경적일 뿐더러 분명한 한계가 있다. 산과 사람과 사찰, 모두를 위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출입금지!

 금륜보전, 효령각을 잠깐씩 둘러보고 곧장 연주대로 향한다. 산등성에 올라서니 화강암 암괴 틈사이로 뿌리를 내린 키 작은 소나무들이 바람을 맞고 있다. 훼손이 심해 드나들지 말라고 통나무 울타리를 세워 놓았건만 무용지물이다.

산이 앓고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살이 허물어지고 인대가 끊어지고 뼈가 드러난 상황 아닌가! 선조들은 등산이라 하지 않고 입산이라고 했다. 입산에도 지켜야 할 윤리가 있다. 입산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이 입산이 허락되는, 그런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르겠다.

   
관악사지. 연주암에서 연주대로 가다 보면 내려다보인다.

관악산이 '불의 산(火山)'이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여서 굳이 예서까지 중언부언 늘어놓을 일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관악산의 그 불기운을 막고자 조선 조정에서 취한 여러 가지 방술 가운데 사실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 내용이 있어서 한 가지만 짚어 두고 가고자 한다.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고자 취한 것이라고 전해지는 방술 가운데 하나가 광화문 앞의 해태상이다. 해태가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간주되어 궁궐건축이나 전통문양에 자주 등장한 까닭이다. 그런데 광화문 앞의 해태상은 원래 위치가 그곳이 아니었다.

해태, 한자로는 해치(獬豸)라고 한다. 이 친구는 원래 뿔이 하나이고,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가려내는 능력이 있으며, 성품이 매우 충직하기까지 해서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서로 따지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옳지 못한 자에게 달려들어 무는 성질이 있었다. 그래서 옛날 중국의 우 임금 시절에 법 집행을 맡은 고요(臯요)라는 신하는 옥사를 다스릴 때 이 짐승을 써서 죄가 있는 사람을 들이받게 했다고 한다.

   

제자리에 있는 해태상(1890년대의 사진) - 사진 왼쪽 끝에 노둣돌의 일부가 보인다.

광화문 앞의 해태상은 원래 지금의 정부종합청사와 세종문화회관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위 사진 참조).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따지고 관원의 비리를 조사하여 탄핵하는 업무를 맡아보던 사헌부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헌부, 요즘으로 치자면 검찰청이다. 해태는 사법기관의 상징이었다. 하여, 사헌부의 관원들은 치관(豸冠)이라고 하는 해태가 장식된 모자를 썼으며, 동급의 다른 관원들이 학을 흉배의 문양으로 취한 것과 달리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은 해태를 수놓은 흉배를 하고 다녔다. 또 사헌부 정문 앞에 해태상을 두어 그 앞을 지나 궁궐로 들어가려는 관원들에게 행동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바로 이 해태상 앞에 ‘ㄴ’자 모양의 노둣돌이 놓여 있어서 ‘여기서부터는 궁궐의 영역이니 임금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누구든 가마나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의 표지로 삼았다. 사법의 상징인 해태가 어쩌다가 관악의 불기운을 막는 소방신으로 변모 했는지 모를 일이다.

   

 연주대

10여분쯤 걸었을까, 마른 잎을 달고 있는 신갈나무 가지 사이로 하늘을 향해 솟구친 칼바위와 그 위에 둥지처럼 들어앉은 연주대가 보인다. 파란 하늘 아래 회갈색 바위와 방풍판의 붉은 단청이 어찌 저리 잘 어울릴까. 들어앉은 모양새도 모양새지만 색의 조화가 그야말로 환상이다.

자연이 빚어낸 이 놀라운 마술은 공룡이 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억7천만년 전 공룡의 시대, 중생대 지각운동 시 땅 속의 마그마가 지각의 틈 사이로 분출하여 지상으로 솟구쳐 오른다. 편마암이 녹아서 마그마가 되고 마그마가 굳어서 된 것이 화강암이다. 연주대의 칼바위는 지상으로 솟구친 마그마가 그대로 굳어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지나며 뜨거움의 기억은 잊혀졌다. 바위는 바람과 비와 눈에 풍화되고 침식되는 과정을 반복하여 지금의 형상을 갖추었다.

칼바위 같은 형상은 암석에 절리가 많을 때 발달한다. 또 같은 암석이라도 절리의 방향과 간격에 따라 풍화정도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위의 모양과 크기가 달라진다. 같은 화강암이면서 관악산의 칼바위와는 달리 북한산의 백운대나 인수봉이 거대한 돔(dome)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절리의 차이 때문이다.

   
차일암(遮日岩) 풍경

연주대 뒤쪽의 바위산은 젖무덤 같기도 하고 둔중한 엉덩이 같기도 한 형상이다. 양녕대군이 동생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주 올라 허전함을 달래었다는 바위다.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고자 차일을 쳤던 흔적이 있다 하여 차일암이라 부른다.

차일암이 어느 시골 5일장 분위기다. 사람들, 정말 "많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는지 바위산이 닳고 닳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놀라움으로 벌어진 입이 쉽게 다물어지지 않는다. 탐방이나 답사 때문에 산이나 숲을 자주 찾는 편이기는 해도 정상까지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서 이런 광경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조심조심 철난간에 의지하여 연주대로 가는 바위산을 탄다.

연주대(戀主臺)는 처음에 영주대(靈珠臺) 또는 염주대(念主臺)라고도 불리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야 연주대라는 명칭으로 일반화 되었다고 한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선 분분하다. 세자의 지위를 내놓아야 했던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두 왕자와의 관련설이 있고, 고려왕조를 그리워 한 사람들과의 관련설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에 스님들께서는 연주대를 影炷臺(영주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연주대에 관한 성호 이익의 기록에 의하면, 바위 끝에 구멍을 파서 등불을 넣어 두는 곳으로 만들어 도성 안에서도 그 빛이 보이도록 하였다는데, 이 이야기가 묘하게도 影炷臺(영주대)라는 이름과 딱 맞아떨어진다.

   
연주대에서 바라본 서울. 눈이 시리게 맑은 날이었음에도 대기오염으로 인해 거무스름한 띠가 서울 상공에 드리워 있다.

산 정상부인지라 조망 하나는 시쳇말로 끝내준다. 멀리 서울 시내 복판을 가로질러 한강이 돌아나가고 칙칙하고 뿌우연 연무 속에 남산이 보인다. 대기오염이 심해 북한산이나 도봉산은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과천 시내와 건너편 청계산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연주대는 나한존자를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좁은 공간에 기도하고 참배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아래는 천 길 벼랑. 머리가 다 어질어질하다. ..그만 돌아가자.

   
연주대 비둘기

뭘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바위 위에 내려앉은 녀석들과 카메라 LCD화면을 번갈아 확인한다. 집비둘기가 분명하다. 수많은 등산객들을 따라 도시의 집비둘기가 이 험한 산정을 행동권으로 삼는 지경이 되었다.

등산객들의 행동유형과 특정 조류의 행동양태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산 길에 등산로에서 먹이를 쪼고 있던 멧비둘기는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어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먹이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귤껍질이며, 과자, 빵부스러기, 밥알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주니 점점 길들여져서 야생성을 잃어간다.

저 아래에 자운암(慈雲菴)이 있단다. 우리는 자하선생의 흔적을 찾아 내려갈 것이다. 자하선생의 이름을 젖혀놓고 어떻게 관악산을 노래할 수 있을까.

하산은 수월하지 못했다. 다리가 이미 풀려버릴 대로 풀려 버린 탓이다. 우짤꺼나! 카메라는 모두 배낭에 집어넣고 아무 생각 없이 내려가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 불교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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